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김광규(金光圭, 1941년 ~ , 서울 출생) 시인, 1975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 동 대학원 독문과에서 문학석사, 문학박사학위를 받음. 세부전공은 독일 현대시문학. 시집으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반달곰에게》,《아니다 그렇지 않다》,《크낙산의 마음》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양대학교 독문과 교수 역임. 현재 명예교수로 있음.
체코 프라하-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