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야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람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소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노천명(盧天命, 1911년 9월 1일 ~ 1957년 6월 16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기자, 시인, 작가, 소설가, 언론인이다. 사슴을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에 비유한 시로 유명하다. 대학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부녀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했고, 1951년부터는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직원으로도 근무했다.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박택면 비석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선인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천명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38년에 퇴사했다. 1938년 조선일보사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그 뒤 4년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으며, 1943년에는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1938년 1월 1일 처녀시집 《산호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라는 시는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을 입었을 것을'이라며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일제의 인적 수탈(강제 징병)을 찬양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45년 2월 25일 시집 제2집 《창변》을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편집]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파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파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해방 직후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고, 서라벌 예술대학 등에도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다.
1946년 부녀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동시에 부녀신문 편집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모교인 이화여대의 출판부에 졸업생 자격으로 참여하여 이대 출판부 일에도 참여, 1956년 5월에 발표한 《梨大 70年史》의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하였다.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 전집》을 내면서 제2권에 몇편의 시를 발표, 《노천명집》을 수록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1953년 3월 30일 제3차 시집 《별을 처다보며》를 출간했다. 1951년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촉탁에 임명되었다.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누하동 자택에서 요양하다가[4]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남원 숯가마 찜질방 굴뚝연기-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