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훈(月暈)
박용래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 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깍기도 하고 고구마를 깍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 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 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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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는 1925년 충남 논산군 강경읍에서 바로 위의 누나와 열 살이 넘는 터울이 지는 막내아들로 태어나는데 바로 손위였던 홍래누나는 훗날 그의 시에도 나올만큼 어린 박용래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 홍래 누이는 시집을 가서 1년도 안되어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박용래는 울지도 못했다.
박용래는 중학교 시절부터 '부활' '죄와 벌'등을 읽으며 문학에 빠져든다. 1943년 당대 명문으로 꼽히던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조선은행 서울 본점에 근무하다가 은행을 그만두고 1946년 생활고에 쫓겨 계룡학숙에 교사 자리를 얻어 상업과 국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거기서 박희선 정훈,이재복 등과 '동백시회'를 꾸린 뒤 동인지 '동백'을 펴내며 본격적인 시 습작기를 보낸다.
1955년 '가을의 노래'로 <<현대문학>>에 박두진의 초회 추천을 받고 이듬해'황토길'과 '땅'으로 완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다. 1956년 독신으로 살리라던 결심을 풀고 대전 간호학교 출신의 이태준과 결혼한 후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1965년 송악중학교를 끝으로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퇴직금으로 장만하여 문 옆에 한 그루 감나무가 있다하여 청시사(靑枾舍)라 명명하고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오류동의 집은 이제 노상주차장으로 바뀌어 흔적도 없다. 다만 얼마 전 대전시와 대전 문인들이 세워놓은 표지석이 그의 집터가 있던 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이다.
박용래는 분명 눈물 많은 시인이었으나 시 쓰기에 임하는 태도만큼은 매우 엄격하여
몇 구절의 시에 생애를 걸고 평생 시인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어느 직함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9년 펴낸 첫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을 받는다. 1975년에 두번 째 시집 '강아지풀'을, 1979년에 펴낸 세번 째 시집 '백발의 꽃대궁'으로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1980년 여름 취중에 길을 건너다 택시에 치여 3개월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뒤 같은 해 11월21일 셋째 딸 수명이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안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문단 생활 25년 동안 1백여 편의 작품만을 남길 정도로 과작이었던 박용래의 시비는
한밭의 주봉인 보문산(458m) 사정공원에 있다. 1984년 시인 조만익의 열정적인 주도로 건립되었는데 대부분 가난한 글장이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한밭의 첫 시비(詩碑)다. 너비85cm. shvdl 3m 22cm)의 검은 오석에 그의 시 '저녁눈'이 새겨져 있다.
제주도-200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