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는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호미에 손을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白亞). 1901년 5월 9일 대구 출생. 7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백부의 훈도를 받으면서 가정 사숙(私塾)에서 수학했다.
18세때 경성중앙학교 3년을 마쳤고,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친구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1921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를 겪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927년 의열단 이종암(李鍾巖)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고, 1937년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일본관헌에 붙잡혀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대구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교남학교를 그만둔 후 「춘향전」의 영역본(英譯本)과 국문학사 등을 기획하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으나, 완성치 못하고 1943년 3월 21일 사망했다. 대구광역시 달성공원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경기도 석화촌-2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