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호는 청마.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정지용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순수를 향한 열망을 담은 시 <깃발>을 비롯,<생명의 서>등의 주요 작품을 남겼다. 도도하고 격조 높은 시심을 기교 없이 과감하고 거침없이 울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원주고려원-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