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연못
나희덕
물이 빠진 거대한 연못,
오래전 눈에 박힌 풍경이 나가지 않네
장화 신은 발들이
몸속을 저벅저벅 걸어다니네
울컥 고이는 발자국들,
검고 끈끈한 진흙이 삼켜버리네
호미를 든 손들이
몸속에 깊이 박힌 연뿌리를 캐네
숭숭 뿌리 뽑힌 자리마다
진흙이 뱀처럼 흘러들어 스르르 문을 닫네
장갑을 낀 손들이
몸속에 흩어진 잔해를 끌어모으네
이토록 태울 게 많았던가
번제를 울리듯 어떤 손이 불을 붙이네
타오르면서 타오르지 않은 불의 중심,
명치 끝이 점점 뜨거워지네
눈이 너무 매워 움직일 수가 없네
뇌수 사이에서 썩어가던 기억의 잎과 줄기가
몇 줌의 재가 되어가는 동안
장화 신은 발들이 불을 둘러싸고 서 있네
그들이 주고받은 얘기가 들렸다 안들렸다 하고
누구일까, 내 몸을 제물삼아
마른 연못 속에서 불을 피우는 그들은
나희덕-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섬세한 안목과 정갈한 언어로 상처조차 따듯하게 쓰다듬는 시를 써왔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강원영월주천 요선정-2009.5